아래 내용은 김철호의 <국어독립만세>(유토피아, 2008)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1.
띄어쓰기는 중요하다. 띄어쓰기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문장의 뜻이 올바로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을 쓸 때에는 각 단어를 구별해서 띄어 써야 한다. 원칙은 '각 단어를 구별해서 띄어 쓰는' 것이다.

예) 터널안굽은길,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2.
문제는 '단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단어'를 규정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국어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분분할 정도이다.

'나가다'(나다+가다)는 한 단어인가? 두 단어인가? 띄어 써야 하는가? 붙여 써야 하는가? '들어오다'(들다+오다)는? '걸어가다'(걷다+가다)는? '걸어다니다'(걷다+다니다)는?

'대량 살상무기'인가? '대량살상 무기'인가? 아니면 '대량살상무기'인가?
'청소년범죄 예방'인가? '청소년 범죄예방'인가? 아니면 '청소년범죄예방'인가?

'중세 미술연구'와 '중세미술 연구'의 의미는 다르다. '중세미술연구'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의미할 수 있다.
'근대 음악연구자'와 '근대음악 연구자'의 의미는 다르며, '근대음악연구자'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의미할 수 있다.
'현대경제학'은 '현대의 경제학'과 함께 '현대경제를 연구하는 학문'을 의미할 수 있다.

'한자문화권'에서 '한자'와 '문화' 사이의 친화성이 '문화'와 '권' 사이의 친화성보다 더 높으므로 '한자문화권'이라고 붙여 써야 한다. '한자 문화권'이라고 띄어 쓰는 것은 좋지 않다.

'알코올중독자'라는 말은 '알코올'과 '중독'이 먼저 결합하여 '알코올중독'이 되고, 그 다음에 사람을 뜻하는 '자'가 붙어서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으므로, '알코올 중독자'라고 띄어 쓰기보다는 '알코올중독자'라고 붙여쓰는 것이 더 타당하다.

띄어쓰기를 잘 하려면 글의 흐름을 꿰뚫고 있어야 한다. 한 '단어'는 한 덩어리 '의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띄어쓰기를 잘 하려면 의미의 흐름, 즉 문맥을 잘 파악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적확한 띄어쓰기는 날카로운 사유를 요구한다.

3.
한글 맞춤법 규정 - '각 문장의 단어는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한다'

예외1: 조사는 앞말에 붙여 쓴다. 조사는 낱말이다. 하지만 뜻은 없고 문법상의 기능만 한다. 의미상 독립성이 약하니 앞말에 붙여서 쓰라는 뜻이다.

예외2: 단위를 나타내는 명사는 띄어 쓰는 것이 원칙이지만, ('두시 삼십분' '제일과' '삼학년' '육층'처럼) 순서를 나타낼 때나 ('2007년 11월 13일' '800원' '7미터'처럼) 숫자와 어울렸을 때에는 붙여 쓸 수 있다.

예외3: ('이때' '그곳' '좀더 큰것' '이말 저말' '한잎 두잎'처럼) 한 음절로 된 단어가 잇달아 나올 때에는 붙여 쓸 수 있다.

예외4: 보조용언은 경우에 따라 붙여 쓸 수 있다. 보조용언은 조사와 마찬가지로 의미상 독립성이 약하다는 점을 고려한 규정이다.

예외5: 성과 이름을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띄어 쓸 수 있다.

예외6: 성명을 제외한 고유명사는 단위별로 붙여 쓸 수 있다.

예외7: 전문용어는 붙여쓸 수 있다.

4.
띄어쓰기를 하는 이유는 그래야 뜻이 잘 통하기 때문이다. 붙여 쓰든 띄어 쓰든 의미 전달에 좀더 유리한 쪽으로 결정하면 된다. 다만,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예컨대 규정에는 '먹을 텐데'로 띄어 쓰라고 되어 있지만 '먹을텐데'로 붙여 쓰더라도 독자들이 이해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혹은 의미전달에 더 유리하다는) 판단이 선다면 과감하게(!) 이쪽을 택할 수도 있는 문제이다. 다만 일관성의 유지는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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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글의 '논리성'은 도대체 어떻게 결정될까?

글은 문단들로, 문단은 문장들로, 그리고 문장은 단어들로 이루어진다.

1.
단어들의 관계에서 작동하는 논리가 바로 맞춤법과 띄어쓰기이다. 단어와 단어가 만나면 그 어떤 논리가 적용된다.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맞는 글이란 다름아닌 단어들이 논리적으로 결합해 있는 글이다. 그 논리, 단어들 간의 관계 속에 숨은 논리를 이론적으로 설명해 놓은 것이 맞춤법과 띄어쓰기 규정일 것이다. 이 규정은 분명히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단어들의 고유한 속성과 무관하게 자의적으로 부과된 것은 아니다. 각각의 단어는 자신의 고유한 형태와 속성, 즉 형태소를 가능한 대로 유지한 채로 다른 단어와 결합하려고 한다. 이 자연스러운 논리를 존중하는 것이 맞춤법과 띄어쓰기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다. '발근다리떠올라따'라고 하지 않고, '밝은 달이 떠올랐다'라고 쓰는 것은 '밝다'와 '달', '떠오르다'의 고유한 형태와 속성이 가능한 대로 유지되도록 하기 위함이며, 그것이 바로 단어들 간에 존재하는 공존의 논리를 존중하는 것이다.
 
2.
단어들은 한데 어울려서 문장을 이룬다. 하나의 문장이 갖추어야 할 고유한 논리는 바로 '문법'이다. 단어와 단어가 비문법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문장을 이룰 때, 행여 그 문장이 맞춤법과 띄어쓰기 규칙을 철저히 지켰더라도, 그 문장은 비논리적인 문장이 된다. '아버지가 방을 들어가신다'는 문장에 어떠한 맞춤법 오류나 띄어쓰기 오류도 없지만, 이 문장은 비문법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비논리적이다. 문법은 현실의 논리와 무관하게 형성된 것이 아니다. 문법은 현실의 논리를 언어적으로 체계화함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날씨를 춥다'거나 '책이 읽는다'는 식의 표현이 비문법적인 이유는, 그것이 비논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논리와 문법은 동일하다. 논리적인 문장은 문법적으로 옳은 문장이고, 문법적으로 옳은 문장은 논리적인 문장이다.

3.
하나의 문장은 일정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더 구체적인 의미는 문장과 문장이 만날 때에야 비로소 생겨난다. 하나의 문장만 존재할 때 그 문장의 의미를 가능케 하는 맥락의 수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문장과 문장이 만나서 문단을 이룰 때 그 문단의 의미를 가능케 하는 맥락의 수는 줄어든다. 하나의 문단을 이루는 문장들이 동어반복적이지 않을 수록 맥락이 더 구체적이게 되므로 문장들의 의미 역시 분명해진다. 그러나 아무리 여러 문장들이 결합해 있더라도 동어반복적인 말만 되풀이하는 경우, 문장들의 의미는 계속해서 모호하다. 따라서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동어반복적인 표현은 줄이고,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는 문장들을 연결하여 문장들의 결합 속에서 맥락이 구체화되고 의미가 분명해지도록 해야 한다.

4.
문장들이 결합할 때, 단어들이 결합할 때 작동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논리가 그 결합을 결정한다. 우리가 통상 논리적인 글쓰기에 관해서 얘기하는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문장들 간에 적용되는 논리는 하나의 문장 내에 적용되는 논리와 다르다. 그래서 문법적으로 옳은 문장들이 모여서 비논리적인 문단/글을 형성할 수도 있다. '날씨가 춥다'와 '그래서 옷을 벗었다'는 문장은, 개별적으로 보면 문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클린턴은 호색한이다'와 '클린턴은 남자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남자는 호색한이다'라는 문장들이 개별적으로는 문법적이지만, 결합되었을 때에는 비논리적이다. '남자는 호색한이다'라는 문장만으로는, 무수히 많은 맥락 속에 놓일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고정되지 않는다. 앞의 두 문장과 결합하면서 맥락이 구체화되고 논리성 여부가 결정된다. 문장들의 관계에서 그 결합의 논리성을 결정하는 것 역시 현실이다. 남자이지만 호색한이 아닌 사람이 존재하는 사실, 즉 현실이 그 문장들을 '비논리적'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과거에는 '백조'가 희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실/현실에 기대어 '1번 백조가 희다', '2번 백조가 희다', '3번 백조가 희다', 'a번 백조가 희다', '그러므로 백조는 희다'라는 문장들의 결합이 논리적, 즉 과학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날 검은색 백조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a번 백조는 희다'라는 문장과 '그러므로 백조는 희다'라는 문장의 결합은 비논리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문장들의 결합은 언제나 논리적일 것을, 즉 현실을 반영할 것을 요구한다. 아무리 문법적인 글이더라도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비논리적인 글은 좋은 글이 아니다.

   논리적 비논리적 
 문법적 문법적이고 논리적인 글
좋은 글 
문법적이지만 비논리적인 글
나쁜 글 
 비문법적 비문법적이지만 논리적인 글
아쉬운 글
비문법적이고 비논리적인 글
의미없는 글

5.
문단과 문단의 관계도 문장과 문장의 관계처럼 논리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각각의 문단이 내적으로 논리적이더라도 그 문단들의 연결이 전혀 논리적이지 않으면 비논리적인 글이 된다. 처음부터 문단을 논리적으로 연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문장들을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훈련을 꾸준히 해야 문단들도 논리적으로 연결할 수 있게 된다.  

6.
결국 글은 현실과 연결되어야 한다. 현실의 작동 논리가 글 안에서도, 문장과 문장의 연결을 통해서, 문단과 문단의 연결을 통해서, 드러나야 한다. 글의 논리성 여부를 판단하는 최종적인 근거는 언제나 '현실'이다. 그런데 글이 현실과 제대로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왜곡하여 인식하게 한다. 흑인이 백인보다, 여성이 남성보다, 동양이 서양보다 열등하다는 이데올로기는 흑인과 여성과 동양의 현실을 왜곡해서 이해하게 한다. 글쓰기에 이데올로기가 개입되는 순간, 현실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되고, 그 결과 글의 논리 역시 왜곡된다. 이데올로기의 힘은 매우 강해서, 그것을 비판적/성찰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면, 쉽게 모든 현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황우석 박사의 배아복제 실험이 실패로 밝혀진 후에도 이른바 '황빠'들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서 황우석 박사에 대한 비판을 음모라고 여기며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광우병과 관련한 PD수첩의 보도를 MB는 '정권 때리기'나 '좌파의 음모'라고 생각하고서 보복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적 현실 인식은 이데올로기적 독해로도 이어진다.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정부는 반정부적 음모가 숨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글쓰기'로 규정함으로써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으로 독해하면서 사법적 처리까지 하려고 한다. 그러나 장미빛 전망을 내놓고 책임지지 못할 투자를 권유하는 증권사의 '찌라시'는 이데올로기적이지 않고, 암울한 전망을 내놓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일까? 광우병과 관련한 PD수첩의 보도는 이데올로기적이고, 그 보도를 허위사실로 몰아가면서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강행하는 것은 과연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은 것일까? 장자연의 죽음과 관련하여 문건유출 경위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이지 않고, 특정 신문사의 실명을 거론하며 죽음과 관련한 고위층 인사들의 책임을 묻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일까? 일본에 도피해 있는 기획사 사장 김씨만을 기다리는 경찰의 행동은 이데올로기적이지 않고, 연예계의 성상납 의혹을 캐는 행위는 명예훼손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보도일까?

7.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것이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글쓰기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비판적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글쓰기는, 그리고 우리의 삶은, 언제나 자기 논리를 잃은 채,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고 만다. 이데올로기를 비판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현실 인식에 개입하는 이데올로기를 의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판은 곧 반성이요 성찰이다. 글의 논리성은 언제나 현실을 기준으로 판단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현실은 경합하는 이데올로기들과 무관하게 홀로 그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속에서 끊임없이 발견되고 구성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언제나 이데올로기 비판이어야 하고, 언제나 현실의 재구성이어야 한다. 이데올로기에 찌든 말과 글을 통해서 현실을 인식하기보다, 현실과 직접 대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깨달을 수 없는 것들에 관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간접적으로, 이미 생산된 지식에 의존해서 현실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면, 반드시 '비판적'으로 그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과연 현실이 그러한가? 현실이 다르게 인식될 수는 없는가? 현실 인식이 이토록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면서 현실을 가능한 대로 정확하게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이 글로 이루어질 때 비로소 글은 논리적일 수 있게 된다. 

  현실정합 현실왜곡 
 내적으로 논리적 좋은 글 이데올로기적인 글 
 내적으로 비논리적 불가능 나쁜 글

8.
당파성과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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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이란 무엇인가? (예문: <J커브>중에서)
2. 압축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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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의 파악 (예문: 내가 축구를 좋아하는 이유)
1.1. 문단의 개요 정리
1.2. 문단의 범주화

2. 글의 개요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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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재와 주제, 그리고 제목 구분하기

2. 주제문 찾기

3.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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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학에서 쓰는 글의 유형

1.1. 대학에서 쓰는 글은 대학 바깥에서 쓰는 글과 형식과 내용 면에서 다르다. 특수한 사회인 대학에서 우리는 대학 구성원들이 요구하는 글을, 또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써야 한다. 글을 쓰기에 앞서서 우리는 자신이 어떤 종류의 글을 써야 하는지를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자신이 써야 하는 글의 종류와 그 성격, 특징 등을 모르면서 무작정 글을 쓰는 것은 금물이다.

1.2. 대학에서 학생들이 쓰는 글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필기, 요약문, 감상문, 논평문, 보고서, 논문, 구두발표를 위한 PPT와 발표요지문 등이 있다.

1.2.1. 가장 빈번하게 쓰게 되는 글은 ‘필기’이다. 필기는 어디까지나 필기자 자신만을 위한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라는 점에서 다른 모든 대학에서 쓰는 글들과 구별된다.

1.2.2. 그 밖의 다른 글들은 모두 읽는 이를 전제하는 공적인 글이다. 그러므로 읽는 이, 곧 수신자가 발신자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한다.

1.3. 요약문, 감상문, 논평문은 그 분량이 짧다는 점에서 다른 글들과 구별된다.

1.3.1. 요약문을 과제로 내주는 것은, 그 대상이 책이거나 영화이거나 그 무엇이거나 간에, 단지 책을 읽었거나 영화를 봤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요약문에는 요약의 대상이 되는 글의 내용이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어야 한다. 일부분만을 떼어내어 요약하거나 자신의 주관적인 감상이나 판단을 주로 쓰는 것은 피해야 한다.

1.3.2. 감상문이 요구하는 것은 기계적인 요약이 아니라 읽은 이의 주관적인 느낌이다. 따라서 감상의 초점이 텍스트의 일부분에 맞춰질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텍스트를 읽음으로써 촉발된 주관적인 감흥을 얼마나 잘 표현하느냐이다.

1.3.3. 논평문은 주관적 감상이 아니라 객관적 판단과 근거를 요구한다. 논평의 초점은 글쓴이의 주관에 따라서 자유롭게 정할 수 있지만 그 근거만큼은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

1.3.4. 요약문, 감상문, 논평문을 쓸 때에는 인용의 규칙을 엄격하게 지킬 필요가 없다. 특히 요약문은 모두 남의 말임이 분명하므로, 내 글과 남의 글을 구분하는 것이 불필요하다. 다만 감상문과 논평문을 쓸 때에는 직접인용과 간접인용을 구분하여 남의 말을 이용하되 괄호 안에 간단히 쪽수만을 적는다. 무슨 책을 대상으로 하는 글인지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1.4. 보고서와 논문은 분량이 상대적으로 길다는 점에서 다른 글들과 구별된다. 보고서와 논문에서는 인용의 규칙이 엄격하게 적용된다.

1.4.1. 보고서는 판단을 내리는 글이 아니라, 판단을 내리는 것을 돕는 글이다. 투자결정을 돕기 위한 것이 경제동향보고서이고, 정책결정을 돕기 위한 것이 정책보고서이다. 청와대와 국회, 그리고 각종 연구소에서 일하는 비서들과 연구원들이 매일같이 보고서를 쓰는 이유는 자신들이 어떤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정권자의 판단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보고서는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정보들을 잘 선별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야 한다. 정보의 정확성은 보고서의 생명이다. 보고서는 선택가능한 결정들과 각각의 결정들이 불러올 결과들에 대한 예측도 포함할 수 있다.

1.4.2. 논문은 보고서가 가지고 있는 미덕을 모두 포함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주장을 담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대학에서의 공부는 논문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완결된다.

1.5.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작성하는 PPT와 발표요지문은 구두발표를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앞의 유형들과 구분된다. PPT와 발표요지문은 어디까지나 구두로 이루어지는 발표를 위해 존재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구두발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PPT나 발표요지문 배포를 생략할 수 있다. 관습적으로 PPT 등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1.5.1. PPT는 결코 구두발표의 ‘자막’이 아니다. 발표할 내용을 그대로 문장으로 적어서도 안 되고, PPT를 보고 읽어서도 안 된다. 구두발표를 효과적으로 돕지 못한다면 PPT는 굳이 필요 없다.

1.5.2. 구두발표를 위한 보고서를 먼저 작성하고서 PPT를 만들어야 한다. 내용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즉석에서 PPT부터 만들어서는 안 된다. 발표를 위한 임시 보고서를 먼저 작성하고 나서, 그것에 근거해서 PPT와 발표의 전체 구조와 핵심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발표요지문을 만들어야 한다. 발표요지문 대신에 PPT를 축소출력하여 배포해서는 안 된다.

1.5.3. 발표 후에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발표할 때에 사용했던 PPT를 그대로 출력해서 제출해서는 안 된다. 보고서와 PPT는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발표에 사용했던 동영상은 필요한 부분만 캡쳐해서 보고서에 싣고, 음성은 녹취해서 필요한 부분을 인용해야 한다. PPT와 보고서 간에 일종의 ‘컨버팅’(converting)이 이루어져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1.6. 핵심은 대학에서 쓰는 글에 여러 종류가 있으며 각각의 글에는 나름의 글쓰는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서 글을 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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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공부하다보면 글을 써야 할 일이 많다. 내일이 제출 마감일인데, 난 책상에 앉아 있고, 읽은 것은 없고, 머릿속은 하얗고, 컴퓨터는 켜 있고, 인터넷에는 남의 글이 떠 있고, 그래서 난 지금 그저 그걸 긁어다가 붙일 뿐이고……. 그렇게 우리는 쉽게 표절을 하게 된다. 오늘날 대학에서 이처럼 남의 글을 베껴 쓰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된다. 그러나 많은 학생들이 무엇이 표절인지, 어떻게 해야 표절을 피할 수 있는지를 몰라서 표절을 하기도 한다. 아래에서는 표절이 무엇이며, 그것이 왜 문제인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표절을 피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인 인용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1. 표절

1.1. 글쓰기에서 표절(剽竊, plagiarism)이란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다른 사람이나 자신의 글을’, ‘마치 자신의 독창적인 글인 양’ 가져다가 쓰는 것을 의미한다. 먼저,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글을 옮겨 쓰는 것이 표절이다. 이 말은 정당한 방법으로 옮겨 쓰면 표절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바로 그 정당한 방법이 인용인데, 인용에 관해서는 뒤에서 설명할 것이다. 다음으로, 다른 사람이나 자신의 글을 옮겨 쓰는 것이 표절이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의 글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글도 표절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른바 ‘자기표절’과 ‘중복게재’이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이미 존재하는 글을 마치 자신의 새로운 창작물인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2. 글만이 아니라 아이디어나 표현도 얼마든지 표절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표절의 대상을 중심으로 표절의 유형을 다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텍스트 표절’이다. 이는 저자의 승인을 받지 않고서, 또 인용의 출처를 밝히지 않고서, 다른 사람이 쓴 글의 전부나 일부를 그대로 가져다가 마치 자기가 쓴 것처럼 이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대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장 수준이 낮은 표절이다. 둘째는 ‘모자이크 표절’이다. 이는 다른 사람이 쓴 글의 일부를 단순히 조합하거나, 다른 사람이 쓴 글에 자신의 말을 추가하거나, 또는 다른 사람이 쓴 글에서 일부 단어를 동의어로 대체하여 마치 자기가 쓴 것처럼 이용하면서 글의 원저자와 출처를 밝히지 않는 것이다. 이것 또한 대학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표절인데, 보통 베낀 글의 앞뒤로 혹은 단락 사이에 자신의 글을 알리바이로 삽입하는 다소 수준이 높은 방식이다. 셋째는 ‘아이디어 표절’이다. 이는 창시자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고서 그 사람의 아이디어 전체나 일부를 그대로 혹은 피상적으로 수정해서 자신의 아이디어(설명, 이론, 결론, 가설, 은유 등)에 도용하는 행위이다. 대학 보고서와 논문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상당히 수준이 높은 표절이다.

1.3. 표절은 저작권법상의 불법행위와 다르다. 어떤 행위가 저작권법상으로 행여 불법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표절은 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죽은 사람의 글이더라도 그것을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자신의 글인 것처럼 옮겨 쓴다면 그러한 행위는 표절이 된다. 그 말은 뒤집어서 저작권법상 권리가 보호되는 저작물을 자신의 글인 것처럼 옮겨 쓴다면 그 행위는 표절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불법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아무튼 표절의 핵심은 다른 사람의 지적 성과물에 대해 자신이 진 빚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는 데에 있다.

1.4. 표절은 왜 나쁜가? 흔히 표절이 남의 업적을 가로채는 일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부당하게 이익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일종의 지적 절도행위라는 말이다. ‘표절’이라는 말 자체의 뜻이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지적 절도행위를 일반적인 절도행위와 다르게 인식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훔친 물건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며, 둘째로 훔친 물건을 과제물로 제출한다고 해서 원래의 물건 값이 떨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표절을 통해서 오히려 이익의 사회적 총량이 늘었을 뿐,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피해가 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표절을 절도행위에 비유하는 것은 오히려 적절치 않은 것 같다. 표절이 나쁜 이유는 그것이 자신을 속이는 일이고 남을 속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자신과 사회의 지적인 성장을 모두 저해하기 때문이다.

1.5. 그런데도 우리는 왜 표절을 할까? 표절이 나쁜 행위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고, 구체적으로 무엇이 표절인지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엇이 표절인지를 알고 그것이 나쁜 행위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표절을 통해서 얻게 될 당장의 이익이 커 보이기 때문에 표절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오늘날 표절을 통해서 얻게 될 이익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반면에 부담해야 하는 위험(risk)은 점점 커지고 있다. 자칫하다가는 성적이 무효 처리될 수 있고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 이제 표절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매우 위험한(risky) 행위인 것이다. 학생들이 표절을 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표절하지 않고서 글을 쓰는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인데, 이제부터 남의 글을 이용하여 글을 쓰면서도 표절하지 않는 방법, 즉 인용의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자.

2. 인용

2.1. 글을 잘 쓰고 싶으면 많이 읽고[多讀], 많이 쓰고[多作], 많이 생각하라[多商量]는 말이 있다. 남의 글을 읽지 않고서 좋은 글을 쓸 수는 없다. 그러나 남의 글을 읽고 글을 쓰다보면 부지불식간에 남의 글의 일부나 아이디어, 표현 등을 도용하게 된다. 이때 표절도 막아주고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이 생각하게끔 도와주는 것이 바로 인용이라는 규칙이다. 인용을 잘 하면 단순히 표절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2.2. ‘인용’(引用)은 그 한자의 뜻처럼 남의 글을 ‘끌어다가 쓰는’ 것이다. 이때 첫 번째로 명심해야 할 것은 끌어다가 쓸 만한 가치를 지닌 글을 끌어다가 써야 한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다. 인용은 그럴만한 필요가 있을 때에 하는 것인지 괜히 그럴 듯하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두 번째로 명심해야 할 것은 남의 글을 왜곡해서 끌어다가 써서는 안 된다는, 마찬가지로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다. 남의 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제대로 인용할 수 있다.

2.3. 인용에는 다른 사람의 글을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옮겨 쓰는 ‘직접 인용’과 다른 사람의 글을 자신의 말로 바꾸어서 이용하는 ‘간접 인용’이 있는데, 특히 직접 인용은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해야 한다. 직접 인용을 할 때에는 큰따옴표를 사용하여 그 부분이 ‘따 온’ 것임을 반드시 표시해야 한다. 남의 글을 가감 없이 그대로 옮겨야할 필요가 없을 때에는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자신의 말로 풀어서 적어야 한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인용만으로 글을 써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글에 필요에 따라서 인용이 붙어야 하지, 수많은 직·간접 인용에 자신의 글이 보조적으로 붙어서는 곤란하다.

2.4. 직·간접적으로 인용한 남의 문장이나 표현 뒤에는 반드시 ‘주석’을 달아서 그 문장이 어디에서 왔는지 출처를 밝혀야 한다. 아이디어나 그림, 사진, 도표 등을 빌려온 경우에도 주석을 통해서 출처를 밝혀야 한다. 주석은 인용자의 정직성과 유식함을 과시하는 기능도 하지만, 동시에 독자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기능도 한다. 따라서 주석에서는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자신이 참고한 자료를 독자가 다시 찾을 수 있도록 그 출처에 관한 정보를 정확하게 제공해야 하지만, 더불어서 독자에게 유용할 수 있는 추가적인 설명이나 정보도 제공할 수 있다.

2.5. 인용한 문장의 출처를 밝히는 주석은 간단하게 본문 안에 달 수도 있고, 본문 밖에 달 수도 있다. 본문 안에 주석을 다는 것을 ‘본문주’라고 하는데, 인용한 문장이 끝나는 지점에 괄호를 치고 그 안에 글의 저자와 출판년도, 그리고 인용한 문장이 있는 쪽수를 적어서 표기한다. 본문주를 사용할 때에는 반드시 글의 말미에 참고문헌을 정리·제시하여 정확한 정보를 필요할 때에 확인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본문주를 사용하더라도 출처 이외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본문 바깥에 ‘각주’를 달아야 한다. 본문주를 사용하지 않고, 아예 각주에 출처를 비롯한 각종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다. 이때에는 어떤 문헌이 처음 언급될 때에만 전체 서지사항을 밝히고 그 다음부터는 저자 이름과 (축약된) 문헌 명, 그리고 쪽수만 적는다.

• 본문주 방식

공진성은 “교육 행위 자체가 상징적 폭력인 한”, 교육 제도와 교육 내용, 그리고 교육자의 지위를 둘러싼 집단 간의 투쟁에서 “투쟁의 당사자들 중 어느 쪽도 폭력 없는 교육을 위해서 싸운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공진성, 2009: 125).

참고문헌
공진성, 2009, <폭력>, 서울: 책세상.

• 각주 방식

공진성은 “폭력의 폭력성을 결정하는 것이 폭력의 사용자가 아니라 폭력의 대상”이라고 주장한다.1)
성폭력과 관련해서 우리가 ‘동일한 행동에 대해서 다른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왜 너만 민감하게 반응하느냐’고 해서는 안 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설명한다.2)
__________
1) 공진성, <폭력>(서울: 책세상, 2009), 23쪽.
2) 공진성, <폭력>, 24쪽.



2.6. 주석을 다는 방법은 학문 분야에 따라서, 학술지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므로, 본격적인 논문을 쓸 때에는 자신의 학문분야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학술지의 인용방식을 참조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 기본적인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위의 두 방식을 기본적으로 익혀두는 것이 필요하다.

2.7. 글을 쓸 때에 필요한 구절을 (직·간접적으로) 인용하고 그 구절의 출처를 주석을 통해서 반드시 명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남의 글을 읽을 때에 언제나 인용해야 할 부분을 표시해 두게 되고 또한 자료의 출처를 기록해 두게 될 것이다. 인터넷에서 필요한 자료를 찾은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인용해야 할 부분과 함께 URL과 검색일 등의 정보를 반드시 기록해 두어야만 자신의 글에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공부는 더욱 능동적이게 된다. 적절한 인용과 정확한 출처의 표시는 학문적 정직성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효율성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3. 요약

• 표절은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다른 사람이나 자신의 글을 마치 자신의 독창적인 글인 양 가져다가 쓰는 행위이다.

• 표절에는 남의 글 전체나 일부를 베끼는 텍스트 표절과, 남의 글들을 또는 남의 글과 자신의 글을 짜깁기하는 모자이크 표절, 그리고 남의 발상을 베끼는 아이디어 표절이 있다.

• 저작권법상의 불법행위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의 지적 성과물에 대한 자신의 빚을 제대로 밝히지 않으면 표절이 될 수 있다.

• 표절은 자신과 타인을 기만하는 행위이며 자신과 사회의 지적 성장을 저해하는 행위이다.

• 인용을 잘 하면 표절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 인용은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만, 그리고 남의 글을 정확히 이해한 후에 해야 한다.

• 인용에는 남의 글을 그대로 이용하는 직접 인용과 자기 말로 바꿔서 이용하는 간접 인용이 있다.

• 인용한 문장 뒤에는 반드시 주석을 달아서 문장의 출처를 밝혀야 한다.

• 주석을 다는 방식에는 출처를 본문 안에 삽입하는 본문주 방식과 본문 바깥에서 밝히는 각주 방식이 있다.

• 본격적인 학술논문을 쓸 때에는 자신의 학문분야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학술지의 출전 표기방식을 참조한다.

• 적절한 인용과 정확한 출처의 표시는 학문적 정직성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효율성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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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쓰기의 시작

1.1. 글을 잘 쓰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은 다르다. 이 말은 우선 그저 글을 썼다고 해서 글쓰기가 끝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글을 쓰고 나서 퇴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글을 잘 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글을 일단 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잘 쓰는 것’과 ‘일단 쓰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전후 단계 모두를 위해서 필수적이다.

1.2. 일단 머릿속에 있는 것을 글로 쏟아내어야 정리를 할 수 있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을 단지 머릿속으로만 그리면서 정리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단어도 좋고, 문장도 좋고, 그림도 좋고, 도식도 좋다. 무엇이든지 머릿속에 든 것을 종이 위에 꺼내놓아야 한다.

1.3. 머릿속에서 갓 탈출한 것들을 문장의 형태로 나열한다고 해서 그대로 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단순히 나열된 글에는 이른바 ‘두서’가 없다. 여기에는 ‘일관성’이 부여되어야 한다. 글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주제(subject)’이다.

1.4. 쏟아져 있는 단어와 문장들을 주제에 맞춰서 정리해야 한다. 버릴 것은 버리고, 살릴 것은 살리고, 살을 붙일 것은 붙이고, 살을 뺄 것은 빼고 하면서 내용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정리해야 한다. 그래야 두서 있는 글이 된다.

1.5. 하나의 주제 아래에도 여러 개의 ‘화제(topic)’가 있을 수 있다. 화제가 다르면, 단락이 달라져야 한다. 하나의 화제가 여러 개의 단락을 이룰 수도 있지만, 여러 개의 화제가 하나의 단락 안에 있어서는 곤란하다. (세 개 정도의 화제가 적절)

1.6. 글에 체계를 부여하면 비로소 글이 제 꼴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좋은 글’이 되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자기 글의 문제점을 직적 볼 능력이 없을 때에는 타인의 도움을 빌려서라도 글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 일필휘지로 좋은 글을 쓰는 것은 함부로 넘볼 경지가 아니다.

2. 읽기와 쓰기의 관계

2.1.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만으로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다른 사람의 글을 자신의 글쓰기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2.2. 말과 글, 구어와 문어는 다르다. 평소에 말을 많이 하고 많이 듣는다고 해서 글을 잘 쓸 수 있게 되지는 않는다. 말은 현장성을 생명으로 한다. 글은 그 현장성을 잃어버리는 대신 지속성을 얻는다. 글에는 말이 생략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2.3. 글을 많이 읽지 않고서 글을 잘 쓸 수는 없다. 정보의 절대적인 투입양이 늘어야 산출양도 늘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

2.4. ‘즐기기 위한 독서’와 ‘글쓰기를 위한 독서’를 구분해야 한다. 목적의식 없는 독서는 밑 빠진 독에 물붓기와 같아서 막상 글쓰기에 이용하고자 할 때에 쓸 만한 재료를 남기지 않는다. 글쓰기를 위한 독서를 할 때에는 반드시 문제의식(키워드, 그물망)을 가지고서, 사용을 염두에 두고서 글을 읽어야 한다. 산출을 의식하고 투입할 때에 효율성이 배가된다.

2.5. 글의 구조를 파악하며 읽는 것도 중요하다. 글의 ‘기승전결’의 구조가 어떻게 짜여 있는지를 파악하면서 읽다보면, 자신의 글 역시 그러한 구조로 짤 수 있게 된다.

2.6.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꼼꼼하게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읽어야 하는 책(자료)인지를 먼저 구분해야 한다. 필요한 책인지를 확인하는 대충 읽기와 선택적으로 읽는 것은 다르다. 언제나 시간적 제한을 두고서, 분명한 문제의식(키워드)을 가지고서 읽어야 한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반드시 정독해야 하는 책이 아니라면, 그물망에 걸리는 것만을 표시하면서 넘어가는 선택적 독서를 하는 것이 훨씬 유용하다. (다만, 선택적으로 읽으라는 말이 텍스트를 부분적으로만, 왜곡해서 읽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2.7. 정독이나 선택적 독서를 통해서, 마치 머릿속의 생각들을 문자로 꺼내놓은 것처럼, 인용할 중요한 문장(빨간색 밑줄)과 그 다음으로 중요한 문장(파란색 밑줄)을 종이 위에 꺼내놓고서 주제에 따라서, 화제에 따라서 다시 분류 정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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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쓰기란 무엇인가?

1.1. 글 ‘쓰기’는 ‘적기’와 다르다. 단순히 글자를 받아 적는 행위와 다르게 ‘글쓰기’는 일종의 표현 행위이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는 필사도 엄청난 공부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을 배우기 위한 수단이지, 새로운 내용의 창조는 아니다.)

1.2. 그렇다면 무엇을 쓰는가?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쓴다. 생각을 글로써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철저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글쓰기에서 주관성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다만 주관성을 망각한 글쓰기를 경계해야 한다.

1.3. 글쓰기는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글쓰기 환경 자체가 어느 정도 생각을 제약한다. 사용하는 언어와 작성 수단, 그리고 작성 환경이 생각을, 곧 표현되는 글을 제약한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에 주어지는 형식 또한 생각과 내용을 제약한다.

1.4. 형식이 단지 내용을 제약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형식이 때로는 생각의 형성을 돕기도 한다. 논리적 형식을 따름으로써 생각을 논리적으로 다듬을 수 있고, 문학적 형식을 따름으로써 생각을 또한 문학적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일정 정도 주어진 형식을 따를 필요가 있으며, 충분히 형식을 습득한 후에는 그 형식을 버릴 필요도 있다.)

1.5. 우리는 왜 글로써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기 때문이다. 왜 그 얘기가 하고 싶은가? 다른 사람의 얘기와 다르기 때문이다. 내용이 다르고 형식이 다르고, 그 결합이 다르기 때문이다. 새롭지 않은 것은 굳이 쓸 필요가 없다.

2. 대학에서의 글쓰기

2.1. 글쓰기는 ‘사회적’ 행위이다. 글쓰기는 언제나 특정 ‘언중(言衆)’을 전제한다.

2.2. 대학 또한 일종의 사회이다. 대학에서의 글쓰기는 대학사회의 구성원을 ‘언중’으로서 전제한다. 그리고 대학사회는 글쓰기의 환경으로서 대학에서의 글쓰기를 가능케 하고 또한 제약한다.

2.3. 훌륭한 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형식 속에 갇혀 있는, 그래서 생각 또한 그 안에 가둘 수밖에 없는) 기존의 글쓰기를 넘어서야 한다. 그러나 배우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기존의 글쓰기를 답습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조선시대의 공부 방법을 보라.)

2.4. 대학에서는 왜 글을 쓰라고 하는가? 글을 쓰는 것 자체가 공부이기 때문이다. 글을 씀으로써 생각을 정리하고 조직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의나 토론 내용을 정리하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그 내용을 머릿속에서 (혹은 글을 쓰면서)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2.5. 정리된 글은 작성자의 이해 정도와 관점을 반영하는 새로운 것이 된다. 글에는 언제나 새로운 것이 담겨 있어야 한다. 기존의 것을 그대로 복사/반복/재현하는 글은 불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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