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글의 '논리성'은 도대체 어떻게 결정될까?
글은 문단들로, 문단은 문장들로, 그리고 문장은 단어들로 이루어진다.
1.
단어들의 관계에서 작동하는 논리가 바로 맞춤법과 띄어쓰기이다. 단어와 단어가 만나면 그 어떤 논리가 적용된다.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맞는 글이란 다름아닌 단어들이 논리적으로 결합해 있는 글이다. 그 논리, 단어들 간의 관계 속에 숨은 논리를 이론적으로 설명해 놓은 것이 맞춤법과 띄어쓰기 규정일 것이다. 이 규정은 분명히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단어들의 고유한 속성과 무관하게 자의적으로 부과된 것은 아니다. 각각의 단어는 자신의 고유한 형태와 속성, 즉 형태소를 가능한 대로 유지한 채로 다른 단어와 결합하려고 한다. 이 자연스러운 논리를 존중하는 것이 맞춤법과 띄어쓰기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다. '발근다리떠올라따'라고 하지 않고, '밝은 달이 떠올랐다'라고 쓰는 것은 '밝다'와 '달', '떠오르다'의 고유한 형태와 속성이 가능한 대로 유지되도록 하기 위함이며, 그것이 바로 단어들 간에 존재하는 공존의 논리를 존중하는 것이다.
2.
단어들은 한데 어울려서 문장을 이룬다. 하나의 문장이 갖추어야 할 고유한 논리는 바로 '문법'이다. 단어와 단어가 비문법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문장을 이룰 때, 행여 그 문장이 맞춤법과 띄어쓰기 규칙을 철저히 지켰더라도, 그 문장은 비논리적인 문장이 된다. '아버지가 방을 들어가신다'는 문장에 어떠한 맞춤법 오류나 띄어쓰기 오류도 없지만, 이 문장은 비문법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비논리적이다. 문법은 현실의 논리와 무관하게 형성된 것이 아니다. 문법은 현실의 논리를 언어적으로 체계화함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날씨를 춥다'거나 '책이 읽는다'는 식의 표현이 비문법적인 이유는, 그것이 비논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논리와 문법은 동일하다. 논리적인 문장은 문법적으로 옳은 문장이고, 문법적으로 옳은 문장은 논리적인 문장이다.
3.
하나의 문장은 일정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더 구체적인 의미는 문장과 문장이 만날 때에야 비로소 생겨난다. 하나의 문장만 존재할 때 그 문장의 의미를 가능케 하는 맥락의 수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문장과 문장이 만나서 문단을 이룰 때 그 문단의 의미를 가능케 하는 맥락의 수는 줄어든다. 하나의 문단을 이루는 문장들이 동어반복적이지 않을 수록 맥락이 더 구체적이게 되므로 문장들의 의미 역시 분명해진다. 그러나 아무리 여러 문장들이 결합해 있더라도 동어반복적인 말만 되풀이하는 경우, 문장들의 의미는 계속해서 모호하다. 따라서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동어반복적인 표현은 줄이고,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는 문장들을 연결하여 문장들의 결합 속에서 맥락이 구체화되고 의미가 분명해지도록 해야 한다.
4.
문장들이 결합할 때, 단어들이 결합할 때 작동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논리가 그 결합을 결정한다. 우리가 통상 논리적인 글쓰기에 관해서 얘기하는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문장들 간에 적용되는 논리는 하나의 문장 내에 적용되는 논리와 다르다. 그래서 문법적으로 옳은 문장들이 모여서 비논리적인 문단/글을 형성할 수도 있다. '날씨가 춥다'와 '그래서 옷을 벗었다'는 문장은, 개별적으로 보면 문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클린턴은 호색한이다'와 '클린턴은 남자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남자는 호색한이다'라는 문장들이 개별적으로는 문법적이지만, 결합되었을 때에는 비논리적이다. '남자는 호색한이다'라는 문장만으로는, 무수히 많은 맥락 속에 놓일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고정되지 않는다. 앞의 두 문장과 결합하면서 맥락이 구체화되고 논리성 여부가 결정된다. 문장들의 관계에서 그 결합의 논리성을 결정하는 것 역시 현실이다. 남자이지만 호색한이 아닌 사람이 존재하는 사실, 즉 현실이 그 문장들을 '비논리적'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과거에는 '백조'가 희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실/현실에 기대어 '1번 백조가 희다', '2번 백조가 희다', '3번 백조가 희다', 'a번 백조가 희다', '그러므로 백조는 희다'라는 문장들의 결합이 논리적, 즉 과학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날 검은색 백조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a번 백조는 희다'라는 문장과 '그러므로 백조는 희다'라는 문장의 결합은 비논리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문장들의 결합은 언제나 논리적일 것을, 즉 현실을 반영할 것을 요구한다. 아무리 문법적인 글이더라도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비논리적인 글은 좋은 글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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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 |
비논리적 |
문법적 |
문법적이고 논리적인 글
좋은 글 |
문법적이지만 비논리적인 글
나쁜 글 |
비문법적 |
비문법적이지만 논리적인 글
아쉬운 글 |
비문법적이고 비논리적인 글
의미없는 글 |
5.
문단과 문단의 관계도 문장과 문장의 관계처럼 논리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각각의 문단이 내적으로 논리적이더라도 그 문단들의 연결이 전혀 논리적이지 않으면 비논리적인 글이 된다. 처음부터 문단을 논리적으로 연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문장들을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훈련을 꾸준히 해야 문단들도 논리적으로 연결할 수 있게 된다.
6.
결국 글은 현실과 연결되어야 한다. 현실의 작동 논리가 글 안에서도, 문장과 문장의 연결을 통해서, 문단과 문단의 연결을 통해서, 드러나야 한다. 글의 논리성 여부를 판단하는 최종적인 근거는 언제나 '현실'이다. 그런데 글이 현실과 제대로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왜곡하여 인식하게 한다. 흑인이 백인보다, 여성이 남성보다, 동양이 서양보다 열등하다는 이데올로기는 흑인과 여성과 동양의 현실을 왜곡해서 이해하게 한다. 글쓰기에 이데올로기가 개입되는 순간, 현실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되고, 그 결과 글의 논리 역시 왜곡된다. 이데올로기의 힘은 매우 강해서, 그것을 비판적/성찰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면, 쉽게 모든 현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황우석 박사의 배아복제 실험이 실패로 밝혀진 후에도 이른바 '황빠'들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서 황우석 박사에 대한 비판을 음모라고 여기며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광우병과 관련한 PD수첩의 보도를 MB는 '정권 때리기'나 '좌파의 음모'라고 생각하고서 보복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적 현실 인식은 이데올로기적 독해로도 이어진다.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정부는 반정부적 음모가 숨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글쓰기'로 규정함으로써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으로 독해하면서 사법적 처리까지 하려고 한다. 그러나 장미빛 전망을 내놓고 책임지지 못할 투자를 권유하는 증권사의 '찌라시'는 이데올로기적이지 않고, 암울한 전망을 내놓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일까? 광우병과 관련한 PD수첩의 보도는 이데올로기적이고, 그 보도를 허위사실로 몰아가면서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강행하는 것은 과연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은 것일까? 장자연의 죽음과 관련하여 문건유출 경위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이지 않고, 특정 신문사의 실명을 거론하며 죽음과 관련한 고위층 인사들의 책임을 묻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일까? 일본에 도피해 있는 기획사 사장 김씨만을 기다리는 경찰의 행동은 이데올로기적이지 않고, 연예계의 성상납 의혹을 캐는 행위는 명예훼손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보도일까?
7.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것이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글쓰기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비판적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글쓰기는, 그리고 우리의 삶은, 언제나 자기 논리를 잃은 채,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고 만다. 이데올로기를 비판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현실 인식에 개입하는 이데올로기를 의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판은 곧 반성이요 성찰이다. 글의 논리성은 언제나 현실을 기준으로 판단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현실은 경합하는 이데올로기들과 무관하게 홀로 그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속에서 끊임없이 발견되고 구성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언제나 이데올로기 비판이어야 하고, 언제나 현실의 재구성이어야 한다. 이데올로기에 찌든 말과 글을 통해서 현실을 인식하기보다, 현실과 직접 대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깨달을 수 없는 것들에 관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간접적으로, 이미 생산된 지식에 의존해서 현실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면, 반드시 '비판적'으로 그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과연 현실이 그러한가? 현실이 다르게 인식될 수는 없는가? 현실 인식이 이토록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면서 현실을 가능한 대로 정확하게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이 글로 이루어질 때 비로소 글은 논리적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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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정합 |
현실왜곡 |
내적으로 논리적 |
좋은 글 |
이데올로기적인 글 |
내적으로 비논리적 |
불가능 |
나쁜 글 |
8.
당파성과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다른가?